Memorial Monument to Sakazaki Dewanokami Naomori
坂崎出羽守供养塔
坂崎出羽守供養塔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공양탑
Sakazaki Dewanokami Naomori was born as Ukita Akiie, the eldest son of Ukita Tadaie, who was a younger brother of Ukita Naoie, the lord of Bizen Domain. Akiie (Naomori) served his cousin Hideie and held a fief worth over 4,000 kl of rice. However, he did not get along well with Hideie and became a vassal of Tokugawa Ieyasu. Later,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 to Ieyasu’s victory in the Battle of Sekigahara (1603), Akiie (Naomori) was appointed lord of Tsuwano Domain, which was worth approximately 5,000 kl of rice. He then changed his family name to Sakazaki.
In addition, Akiie (Naomori) gained Ieyasu’s trust by rescuing Senhime, a granddaughter of Ieyasu, from the burning Osaka Castle during the summer campaign of the siege of Osaka (1615). However, he came into conflict with the Tokugawa shogunate over Senhime's remarriage, resulting in the severing of his lineage and his own suicide. One theory suggests that Akiie (Naomori) tried to take Senhime away on her way to her bridegroom, Honda Tadatoki, in anger over Senhime’s engagement to Tadatoki despite Ieyasu’s promise to allow Akiie (Naomori) to remarry Senhime.
When Akiie (Naomori) was the lord of Tomiyama Castle on Mt. Yasaka (in present-day Yasakahigashi-machi, Kita-ku, Okayama City), the people of the fiefdom put great trust in him. Therefore, after his death, they erected a memorial monument to commemorate his virtues. His grave is located at Yomei-ji Temple in Tsuwano-cho, Kanoashi District, Shimane Prefecture.
坂崎出羽守直盛原名宇喜多诠家,是备前藩主宇喜多直家之弟忠家的长子。他原为其堂兄宇喜多秀家之臣,所持俸禄2万4千石。因为与主君秀家冲突不断,后成为德川家康的属下。在关原之战中因其功绩而受封成为津和野3万石的领主,改名为坂崎。
诠家(直盛)从被烧毁的大阪城中救出了千姬而赢得了德川家康的信任。但是,后却因千姫改嫁而与幕府产生矛盾,导致其家破人亡最终被迫自尽。另一说则是,德川家康曾经约定将千姬许配给坂崎直盛。但千姬与本田忠刻订婚的消息激怒了他,而试图抢夺将嫁给本田忠刻的千姬。
诠家(直盛)曾担任矢坂山的富山城(现冈山市北区矢坂东町)城主时,深受民众的信任。这座供养塔是为了缅怀他在世时的德行而修建。他的墓地在岛根县鹿足郡津和野町永明寺。
坂崎出羽守直盛原名宇喜多詮家,是備前藩主宇喜多直家的弟弟忠家的長子。詮家(直盛)侍奉堂兄秀家,擁有2萬4千石的土地,但與秀家相處並不融洽,後來成為德川家康的部下。其後,因關原之戰立功,成為津和野3萬石的領主,改名為坂崎。
此外,詮家(直盛)在大阪城被燒毀時救了千姫,贏得了家康的信任。然而,他因千姬改嫁問題與幕府發生矛盾,家破人亡而自殺。另一種說法是,家康曾答應詮家(直盛)與千姬再婚,但千姬與本田忠刻訂婚讓詮家(直盛)感到憤怒,他試圖搶走將嫁給本田忠刻的千姬。
詮家(直盛)擔任矢坂山的富山城(現在的岡山市北區矢坂東町)城主時,深受民衆的信任。這座供養塔是為了緬懷他的遺德而修建。他的墓地位於島根縣鹿足郡津和野町的永明寺。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나오모리는 비젠 번주(藩主)인 우키타 나오이에의 동생 다다이에의 장남으로 본래 이름은 우키타 아키이에였습니다. 아키이에(나오모리)는 사촌 형인 히데이에를 섬기며 2만 4천 석의 봉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히데이에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적을 인정받아 쓰와노 3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며 성을 사카자키로 개명했습니다.
또한 아키이에(나오모리)는 불타는 오사카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딸 센히메를 구해낸 일로 이에야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센히메의 재혼을 둘러싸고 막부와 대립하다가 가문의 대가 끊겨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에야스로부터 센히메와의 재혼을 약속 받았지만, 센히메가 혼다 다다토키와 약혼한 것에 격분하여 혼다 다다토키에게로 시집가는 센히메를 납치하려 했다고 합니다.
아키이에(나오모리)가 야사카야마 산 도미야마성(현 오카야마시 기타구 야사카 히가시마치)의 성주로 있었을 당시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었던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공양탑을 세웠습니다. 묘소는 시마네현 가노아시군 쓰와노정에 자리한 요메이지 절에 있습니다.
坂崎出羽守直盛は元の名を宇喜多詮家といい、備前藩主宇喜多直家の弟忠家の長男でした。詮家(直盛)は従兄の秀家に仕えて2万4千石の知行を持っていましたが、秀家との折合いが悪く、徳川家康の配下となりました。その後、関ケ原の戦の功績により津和野3万石の領主となり、名を坂崎と改名しました。
また、詮家(直盛)は焼け落ちる大阪城から千姫を救い出したことで家康からの信頼を獲得しました。しかし、千姫の再婚を巡って幕府と対立し、お家断絶となり自害しました。一説では、家康から千姫との再婚を約束されていましたが、千姫が本田忠刻と婚約したことに腹を立て、本田忠刻のもとに嫁ぐ千姫を奪おうとしたとされています。
詮家(直盛)が矢坂山の富山城主(現岡山市北区矢坂東町)であった頃、領民の信頼が厚く、その遺徳をしのぶため、ここに供養塔が建てられました。墓所は、島根県鹿足郡津和野町の永明寺にあります。
所在地: 〒700-8544 岡山市北区大供一丁目1番1号 [所在地の地図]
電話: 086-803-1042 ファクス: 086-803-1846